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총독부 청사 (문단 편집) ==== [[일본]]의 반응 ==== 철거 결정이 확정된 이후 [[일본 정부]]에서 '''[[커맨드 센터|"우리 일본에서 비용을 전액 지불할 테니 통째로 옮겨가겠다."]]''' 라고 주장했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분노하여 바로 다음 날 조선총독부를 날려버리고 '''"[[일본]] 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하는 폭탄 발언을 던졌다던 루머가 있다. 사실 이 발언은 당시 일본의 역사 관련 도발이 있었는데, '버르장머리' 발언 1주일 전이던 11월 8일에 전해진 에토 다카미(江藤隆美) [[일본 총무성]] 장관의 망언이 결정적이었다. 에토 장관은 '''"[[한일합방]] 당시 [[한국]]은 나라의 힘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단행된 것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한일합방을 통해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 [[식민지 근대화론|한국에 학교도 지어주고, 철도도 만들어주고, 도로도 닦아주지 않았느냐.]] [[창씨개명]]도 강제로 진행되지 않았다."''' 라고 망언을 했다. 그야말로, 불난 집에다 기름 붓는 것보다 더한 유조차를 몰고 들어간 셈이다. 발언이 공개된 이후, 에토 장관은 스스로 물러났지만 이에 대한 사과를 하지도 않았다. 이를 놓치지 않은 김영삼 대통령이 [[장쩌민]] [[중국 주석]]과 정상회담을 마친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했던 명언이 그 유명한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발언이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1180020910700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11-18&officeId=00020&pageNo=7&printNo=23029&publishType=00010|관련 기사]] 시기적으로 건물 해체는 [[광복절|8월 15일]]부터 시작했고, 저 발언은 석 달 후인 11월 14일에 하였다. 이때 [[일본]] 내 웬만한 지한파, [[한국]]통들도 '버르장머리'란 단어를 해석하지 못했다는 후문이 있다. 이 발언 이후 철거과정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이 치솟았다 카더라. 다만, 1995년 지방 선거에서 참패하고 [[1995년 한국통신 파업 사태|한국통신 파업 강제진압]]을 비롯해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라 지지율 유지에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한국갤럽]] 자료에 의하면 1995년 3분기의 업무 수행에 관한 긍정 지지율은 29%이다.[* 참고 그래프:[br][[파일:external/www.gallup.co.kr/GallupKorea_daily_opinion_51-3.jpg]]] 이 철거에 관한 일본 측의 이야기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하며 [[대한민국]] 고건축을 연구했던 학자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 亥治郎)의 책인 《韓의 건축 문화》 증보판 서문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쓰여있다. 역자인 이광노 [[서울대학교]] 명예 교수가 쓴 서문인데, 자신이 1984년 교환교수로 [[일본]]에 가서 후지시마 가이지로를 만났을 때 후지시마가 "지금 조선총독부 청사를 국립박물관으로 쓰고 있다고 들었다. 총독부 건물 속에 [[한국]]의 반만 년 역사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스모]] 선수가 승부에서 지면 상투를 자르듯, 이제라도 그 건물의 상투 부분(돔 부분)을 잘라버려라"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고건축을 연구한 [[일본인]] 학자다운 말이다. 다만, [[일본인]] 고건축 학자가 상투 자르듯이 첨탑을 절단하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서 정말로 말을 따른 것인지는 알 수는 없고, 당시 정치가들과 문화체육부 실무자들의 의견을 자세히 들어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조선총독부 청사의 문제는 한국을 [[식민지|식민지배]]한 총독부의 건물로 세워졌다는 것 외에도 문제가 있었다. [[경복궁 흥례문]] 권역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지어놓은 건물이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고의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있으나, '''경복궁을 가리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원래 광화문과 근정문, 근정전은 일직선에 있어서, 왕이 근정전에 앉으면 [[육조거리]]가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었는데 그 앞을 완전히 막아버린 것이다. 게다가 조선총독부는 저 셋이 이루는 축에 맞지 않게 지어져서, [[2006년]] 12월, 새로 복원하기 이전의 광화문은 각도가 약간 비뚤어져 있었다. 위치 또한 기존 조선총독부 정문 자리에 지어졌다. 그러다 보니 국가 차원에서 중요한 일들이 있을 때마다 현수막이 걸리기도 했다. 사실 이는 진북과 자북의 차이로 인한 것이었지만, [[일본 제국|일제]]의 악의였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 한 가지 논란점이다. 개그맨 [[전유성]]은 "아깝다! 총독 집무실 자리에 화장실을 만들어서 전 국민이 시원하게 볼일을 볼 수 있도록 하면 좋았을 텐데!" 라고 신랄하게 이야기를 했다. 재활용 의견 중에는 전유성처럼 "[[화장실]]로 만들어서 재활용하자든지, 쓰레기 저장고로 쓰면 되겠네?" 처럼 일본을 비하하는 의견이 수두룩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총독부 청사를 일본으로 이전하여 복원하겠다고 제안했다는 소문은 근거가 없다. 조선총독부를 한국 국내의 다른 곳으로 이전해 복원하자는 주장은 철거 수년 전부터 고고학계나 건축계에서 나오던 이야기였는데, 철거 두 달 전인 6월에도 성금을 모으느냐 마느냐 하는 얘기가 나오고 있던 참이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060900239103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6-06-09&officeId=00023&pageNo=3&printNo=23393&publishType=00010|#]] 당시 정부가 계산해 본 바로는 국내 복원 비용이 1400억 원에 달했는데, 일본 정부가 지불하기에는 너무나도 높은 비용이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061100239147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6-06-11&officeId=00023&pageNo=47&printNo=23395&publishType=00010|#]] 한국 국내가 아닌 바다 건너 일본까지 수송한다면 더더욱 비쌌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도 근대 건축 보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도쿄 대공습]]으로 [[도쿄도|도쿄]]가 초토화 되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몇몇 건축물도 상당수가 고도 성장기에 고층 빌딩을 세우기 위해 철거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근대 건축 보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런 관심을 조선총독부 건물에 그대로 투영했던 것이다. 실제로 도쿄의 [[마루노우치]]에 가보면, 근대 건축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파사드만 남겨놓고 상층부는 고층 빌딩을 올린 매우 어정쩡한 모습이 남아 있는 건물도 있다. 그 유명한 서울도서관으로 바뀐 옛 서울시청 청사 또한 이를 참고했다.[* 일본의 이런 문화의 정점은 [[아이치현]]에 있는 [[메이지무라]]다. 근대 건축물을 그대로 옮겨 전시하는데, 몇개의 전시물은 일부 조각만 전시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방식의 '보존'은 랜드마크법이 있는 뉴욕에서도 유효한 방식이다. 대표적인 예시가 보존 대상 건물은 파사드만 남기고 그 위에다 유리빌딩을 꽂은 [[https://en.wikipedia.org/wiki/Hearst_Tower_%28Manhattan%29|Hearst Tower]].]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